음... 그러니까. 우리는 헤어졌다.

 

우리가 정확히 무엇 때문에 헤어졌는지 잘 기억나진 않는다. 우리가 멀어질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 누군가의 마음이 먼저 식었던 것인지. 뭐 사실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우린 하나부터 열까지 너무 달랐다. 연애를 시작할 때 사랑스럽게만 느껴지던 장그래의 모든 것들이, 끝을 향해 갈 때에는 더할 나위 없이 지긋지긋했다 .

 

장그래와 나 사이에는 절대 좁혀지지 않는 간극이 존재했다. 차라리 마음보다 몸이 더 가까웠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지도 모른다. 으르렁거리며 싸우다가도 눈이 맞아 거하게 붙어먹고 나면 적어도 몇 시간은 평화로웠으니까.

 

연애라는 게 그렇다. 처음엔 세상을 다 줄 것만 같은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 유효기간이 다 하기 마련이다. 그렇고 그런 다 똑같은 연애를, 자기들만의 특별한 이야기라 최면을 걸고 살아가는 거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내용들도 별다를거 없다. 처음엔 티격태격 하다가 어느새 정이 들고 사랑하고. 그러다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결국 따져보면 똑같은 과정을 지나간다. 남이 들으면 손발이 오글거릴 대사들도 둘만의 세상에선 로맨틱하고 아련하기 그지 없는 거지.

 

우리의 끝도 보잘 것 없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진부한 대사들을 읊으며 헤어졌다.

 

'마지막이니까 말하는데, 당신 정말 최악입니다.'

'너야말로 그 따위로 살지 마.'

'당신은 진짜 끝까지.. 한석율 씨는 미안하다는 말 할줄 모릅니까?'

'네가 나한테 할 말은 아니지. 앞으로 우리 아는 척 하지 말자. 어?'

'한석율 씨 앞가림이나 잘 하시죠.'

 

그렇게 서로를 다신 안 볼 것처럼 돌아선 우리는 다음 날 엘리베이터에서 민망한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15층과 16층. 서로를 모른 척 하기에는 조금, 가까운 공간이었다.

 

 

 

 

*

 

 

 

 

"장그래 씨랑 싸웠어요?"

"그 자식 얘기 꺼내지도 마."

"그렇게 좋아하더니.. 역시 사람 일은,"

"모르는 거네요."

 

찌릿 하는 내 눈빛에 장백기가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리자 안영이가 말을 이어 받았다. 좋아하다니? 누가 누굴? 되받아치고 싶었지만 누가 봐도 내가 장그래를 따라다닌 건 사실이라 입을 다물었다. 드물게 말을 아끼는 나를 보며 안영이와 장백기는 저들끼리 눈빛과 말을 주고 받았다.

 

"장그래 씨 요새 잘 되는 사람 있는 거 같더라구요."

"아, 하 선생님?"

"네. 장그래 씨 드디어 모태솔로 탈출 할 것 같던데요. 한석율 씨도 하 선생님 알죠?"

"아오, 안 궁금해. 얘기 하지 말라니까."

 

손을 휘휘 내저으며 시팔. 속으로 욕을 씹어 삼켰다. 아무리 꽁꽁 숨겼던 비밀 사내연애였다지만 이건 너무하다. 헤어진 지 일주일 된 전애인의 새로운 썸녀 이야기를 굳이, 이렇게, 생중계로 들어야 하다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장그래 이 자식은.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여자를 만나고 다녀? 아주 살판나셨구만. 게다가 난 투명인간 취급이다. 누가 모태솔로야. 당신들이 장그래 신음 소리를 알아? 술 먹으면 장그래가 얼마나 야하게 변하는지 알고 있냐고. 말도 못해. 그건 마치 꼬리가 99개는 달린..

 

"안녕하세요."

"장그래 씨, 양반은 못 되네요." 

 

허업.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장그래의 얼굴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방금 전 내가 떠올리던 얼굴과는 달리 허옇고 무덤덤한, 모태솔로로 위장한 장그래. 그 아래엔 내가 좋아하던 하늘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탕비실로 걸어 들어오던 장그래에게도 그리 달갑지 않은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인사를 해야 하나. 순간 어색해지는 공기에 할 말을 잃은 내가 먼저 일어섰다.

 

"어, 어. 그럼 다들 수고해."

"한석율 씨, 커피 가져가요!"

"너 먹어."

 

장그래에게 내가 내린 커피를 가리키며 빠르게 탕비실을 나섰다. 달달한 것에 환장하는 장그래가 싫어하는 (장그래 말에 따르면) 담뱃재맛 커피. 그거나 먹어라.

 

 

 

 

*

 

 

 

 

퇴근길에 마주친 그녀는 분명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장그래에게 늘 대담하게 선연락을 해 오던 그 얼굴을 잊을 리가 없다. 핸드폰 화면 밖에서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지만, 나는 한 눈에 그녀가 하 선생 이란 걸 알아볼 수 있었다. 긴 생머리에 제법 예쁘장한 얼굴의 그녀는 장그래를 기다리는 것인지 데이트에 어울리는 차림을 하고 있다. 그냥 지나쳐 가야 했는데. 이미 속이 꼬일대로 꼬인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장그래 씨 기다려요? 그녀는 경계의 눈빛으로 나를 아래위로 훑어 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건물 외벽에 손을 짚으며 한껏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장그래는 이런 옷 안 좋아하는데."

"네?"

"장그래 씨 취향이 좀 독특하거든요. 더 얘기 해 줄까요?"

"아.. 장그래 씨랑 친하세요?"

"친했었죠."

 

눈썹을 찡긋 움직였다. 그녀는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장그래와 친하다는 나의 말에 조금 안심한 듯 했다. 어서 장그래에 대해 얘기해 보라는 눈빛을 보내온다. 그럼 말을 해 줘야지. 나는 이마에 한 손을 올리고 뭔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척 하다가 입을 열었다.  

 

"근데.. 괜찮겠어요?"

"뭐가요?"

"장그래가 사실.. 성격이 좀 그래요. 되게 까다로워."

"네? 그렇게 안 보이던데.."

"아니야. 다 장그래 씨한테 맞춰 줘야 돼요. 안 그러면 얼마나 난리 난리인지 몰라. 입맛도 애기 입맛이라서 말이죠,"

"한석율 씨."

 

으악. 파드득 놀라며 뒤를 돌아보자 눈썹을 잔뜩 찌푸린 장그래가 서 있었다. 나와 하 선생을 번갈아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핫하하..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장그래는 그런 나를 성큼성큼 지나쳐 하 선생에게 다가갔다. 아 시이발. 그녀의 앞에 서는 장그래를 보는 건 기분이 좋지 않다. 하 선생은 반짝 눈을 빛내며 장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키가 작은 그녀와 장그래가 꽤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나랑 장그래 만큼은 아니지만.

장그래는 아무 말 않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는다. 저건, 장그래가 누군가에게 미안해 할 때 나오는 버릇이다.

 

"이렇게 찾아오시면 곤란합니다. 말씀 드렸잖아요."

"아니, 저.. 그래도 왜 거절하는지 이유는 알고 싶어서요."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 연애할 상황도 아니고.. 계속 이러시면 부담스럽습니다."

 

이게 뭐지. 눈 앞에서 두 남녀의 고백과 거절의 진행상황이 빠르게 파악되고 있었다. 그들의 옆에 있지만 먼지 같은 존재가 된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둘의 대화를 조용히 지켜봤다. 

 

"다신 찾아오지 마세요."

"그래 씨. 이렇게까지 해야 돼요?"

"네. 좋은 분 만나세요."

 

단호한 대답에 하 선생의 눈이 그렁그렁 해졌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장그래의 눈이 너무 무감해서 내가 다 심장이 덜컥 하는 기분이다. 우리가 헤어질 때도 장그래가 저런 표정이었던가.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하 선생이 이내 몸을 홱 돌리며 등을 보인다.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괜히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옆에서 장그래의 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뭡니까?"

"어어. 그러니까 그게."

"아는 척 하지 말자면서요?"

"그래. 그랬었지."

 

장그래 특유의 눈빛이 나왔다. 나를 측은하게 여기는 듯한, 한없이 하찮은 미물을 보는 것 같은 표정. 장그래가 등장하기 전까지 내가 하 선생에게 나불나불 읊어댄 대사들이 빠르게 스쳐지나간다.

아.. 장그래, 그런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지 마. 쪽팔리니까.

 

 

 

 

*

 

 

 

 

그러니까.. 일이 이렇게 될 건 아니었다. 시작은 단순했다. 동기들끼리 모여 한 잔 하자는 안영이의 제안에 나와 장그래 둘 다 오케이 해 버린 거다. 우린 어색해진 사이를 들키지 않기 위해 화해한 척 하기로 무언의 합의가 된 것 같았다. 넷이서 다닥다닥 붙은 곱창집에서, 일 문제로 속상해 하는 안영이를 위해 나는 열심히 폭탄주를 말았다. 안영이의 끝이 없는 넋두리와, 술이 약해 금방 취해버린 장백기의 한탄을 이중으로 들으며 나와 장그래는 말 없이 술잔을 비웠다.

 

우리는 이미 얼큰하게 취해 2차를 외치며 맥주집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서 우리는 우리만큼이나 술독에 빠져 있는 그들을 만났다. 어어? 우리 장그래 아냐! 자앙그래! 이리 와, 여기!

 

"대리니임!"

 

장그래는 쪼르르 김동식 대리 옆으로 달려가 앉았다. 나는 빠르게 그들의 면면들을 살폈다. 김 대리, 강 대리, 하 대리, 유 대리. 다행히 성 대리는 없다. 장그래가 달려나간 뒤 눈빛을 교환한 나와 안영이, 장백기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있는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은 어색한 합석을 하게 되었다.

 

이미 다들 취해 있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풀어진 분위기에서 제각각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김 대리는 이번에는 나를 붙잡고 너 인마, 내가 우리 후배님 아끼는 거 알지, 우리 장그래랑 잘 지내야 한다아? 하면서 아까부터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눈을 감고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다 슬쩍 눈을 돌렸다. 하 대리는 유 대리와, 안영이는 장백기와 각각의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장그래는, 강해준 대리와.

 

"장그래씨. 안그래도 같이 술 한 잔 하고 싶었어요."

"아 네에. 저두요."

"지난 번에 고마웠던 일도 있고."

"아닙니다. 그 때는 제가 괜히 나서서.. 죄송해요."

 

답지 않게 다정한 강 대리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배알이 꼴렸다. 쓸데 없이 수줍어 보이는 장그래의 표정도, 눈을 맞추며 웃고 있는 그들의 분위기도,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사실 그때 장그래 씨한테 좀 놀랐습니다."

"아,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그래서 장그래 씨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졌어요."

 

더는 못 듣겠다. 나는 불쑥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대리님."

 

불청객을 달갑지 않아 하는 강 대리의 눈과,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는 장그래의 눈. 두 쌍의 눈동자가 나를 돌아본다.

 

"장그래 성질 더러워요."

"...네?"

"한석율 씨."

 

장그래의 눈빛이 그 입 닥치라고 말 하고 있다. 나는 못본 척 팔을 뻗어 장그래의 어깨를 홱 끌어안았다.

 

"저 아니면 만나 줄 사람이 없어요. 장그래는."

"한석율 씨!!"

 

그러니까 건드리지 마요.

 

 

 

 

*

 

 

 

 

화난 장그래의 손에 팔을 붙잡혀 질질 끌려나왔다. 싸한 바깥 바람을 쐬니 술이 좀 깨는 것 같기도 하다. 멍하게 눈을 껌벅거렸다. 지금 몇 시지.. 고개를 돌리다 나를 매섭게 쏘아 보는 장그래의 눈과 마주쳐 컥, 사레가 들릴 뻔 했다.

 

"미쳤어요? 우리 연애했다고 광고할 일 있습니까?"

"뭐. 내가 거짓말 했어?"

"하아.. 진짜 한석율 씨는."

 

한 손으로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리며 후우우, 숨을 내쉰다. 그런 장그래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예뻐 보이는지 모르겠다. 인상을 쓰느라 잔뜩 구겨진 미간도 섹시하고 귀엽고. 이제 내 것이 아니라서 그런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던 눈인데, 그 눈이 나에게 향하지 않는 걸 왜 이렇게 못 견디겠는지 모르겠다. 장그래의 옆에 나 아닌 누군가가 있는 걸 보면 몸이고 머리고 입이고 미쳐 날뛰는 것 같다.

나도 내가 찌질한 거 안다. 아는데.. 근데 이렇게 밖에 못 하겠다. 멀뚱히 서 있는 장그래의 손목을 낚아챘다.

 

"다시 만나."

"예?"

"다시 만나자고."

"싫은데요."

 

장그래가 내 손을 탁 뿌리쳤다. 벌레를 쫓아내는 듯한 그 손짓에 심장에 한 번 스크래치. 하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한석율이 아니다.

 

"내가 잘못했어. 내가 미안해. 진짜 잘 할게."

 

물러서는 장그래의 몸을 와락 껴안았다. 나는 장그래가 무엇에 약한지 안다. 나의 품, 미안하다는 말, 울음기 섞인 목소리. 그것에 장그래가 무너질 거란 걸 알고 있다. 내가 아는 장그래라면.

내 품에 조용히 안겨 있던 장그래가 차츰 어깨를 들썩였다. 몸을 떼어내고 눈을 마주치자 장그래의 발개진 눈에는 물기가 가득했다. 울먹울먹, 입술이 오물거린다. 한석율 씨이..

그렇지. 으으, 예쁜 것. 가슴이 저릿저릿 했다. 미안해. 속삭이며 젖은 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우리는 키스했다. 지나가는 누군가가 본다면 망측하게 여겼겠지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흔한 연인들의 다툼과 재결합 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의 순간은 어떤 영화나 드라마 속의 장면보다 특별했다.

 

 

 

 

*

 

 

 


장그래는 오랜만에 외박을 했다. 오랜만..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2주 만이었다. 오피스텔 현관에서부터 줄줄이 이어진 옷가지들은 2층으로 가지 못하고 1층 소파 앞에서 끊어졌다. 한 차례 정사를 끝내고 나른하게 늘어진 우리는 여진에 취해 아무 말이나 중얼거렸다.

 

"장그래."

"응."

"근데 우리 왜 싸웠었지?"

"몰라."

"내가 잘못한 거였나?"

"응."

"뭐였지?"

"몰라아."

 

눈이 반쯤 감겨서 웅얼거리는 장그래의 얼굴을 돌려잡고 입술이고 볼이고 쪽쪽 입맞추며 생각했다.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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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서 석율그래 '연애의 온도' 영상을 보고 쓰고싶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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