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그래. 내 사랑도 나인 투 식스 였으면 좋겠어어."
"어휴, 이 아저씨 또 오자마자."

 

장그래는 팔을 벌리며 진하게 엉겨붙는 나를 뜨악한 표정으로 떼어냈다. 웃는 듯 찡그리는 듯 자연스레 나를 밀어내는 장그래는 여전했지만, 오랜만에 마주한 얼굴은 기억보다 더 희고 밝았다. 캐주얼한 스트라이프 무늬의 티셔츠가 말간 얼굴과 잘 어울렸다. 안영이에게만 숙취 해소 음료를 챙겨주는 장그래에게 내 것은 없냐고 칭얼거리자 저 백수 인데요, 하고 뚱하게 대꾸하는 모습이 이젠 제법 편안해 보였다. 정규직 전환에 대한 부담을 훌훌 털어버린 장그래의 웃는 얼굴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계약이 끝나고 회사를 나간 후에 마음 고생이 심했을 줄 알았는데, 어쩐지 장그래의 얼굴은 회사에 있을 때보다 조금 더 살 만해 보였다. 나와는 정 반대로.

 

마지막으로 보았던 시기의 장그래는 어딘가 위태롭고 많이 지쳐 있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가장 친한 동기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장그래였지만, 한낱 입사 2년차 사원일 뿐인 나는 장그래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저 예전처럼 짓궂은 장난을 거는 대신 조용히 어깨를 주무르고 지나가거나 가벼운 포옹을 하며 등을 토닥여주는 것이 다였다. 그러면 장그래는 전과 다르게 나를 밀어내지 않고 풀 죽은 강아지처럼 조용히 내 손길을 받아들이곤 했다. 그 짧고 보잘 것 없는 순간이라도 그에게 힘이 되어주길 바랐다.

 

하지만 장그래는 어느 순간부터 우리와 같이 점심을 먹는 자리조차도 피하기 시작했다. 나를 마주치면 슬쩍 뒷걸음 치다 목례를 하고 지나갔다. 아마 혼자서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장그래가 그것을 원한다면, 나와 만나는 것이 그에게 위로가 아닌 부담이 된다면, 나는 기꺼이 그를 조용히 보내줄 수 있었다.

 

송별회도 없이 담담하게 떠난 장그래의 빈자리는 하루가 지날수록 크게 다가왔다. 나 장그래 보고싶어,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차마 말을 걸 수도 없게 지쳐 있는 장그래였어도 그가 15층에 있다는 것과, 이 건물에 아예 없다는 것의 차이는 컸다. 이제는 우연히라도 탕비실에서 장그래를 마주칠 수 있을까 기대할 수가 없었다. 파티션 위로 빼꼼 나오는 동글동글한 머리통을 몰래 훔쳐보고 갈 수도 없었다. 엘리베이터, 옥상, 1층 로비, 그 어디에서도 앞으로 장그래를 볼 수 없다는 것은 이 숨 막히는 건물에서 나를 더 갑갑하게 했다. 15층은 더 이상 가지 않았다. 아니, 갈 수 없었다. 옥상에 올라가서는 장그래와 티격태격 하다가 주먹을 주고받던 일이 생각나 혼자 코끝이 시큰해지기도 했다. 그렇게 청승을 떨면서도 장그래에게 내가 먼저 연락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했다. 안 그래도 머릿속이 복잡할 장그래에게 원인터를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장그래에게 있어서는 철저히 을이었다. 그저 언젠가 장그래의 연락이 먼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장그래의 연락은 오지 않았다. 대신 안영이가 장그래를 불러냈다. 장그래의 퇴사 후 3주 만이었다. 장그래가 나를 피한 것은 그 전부터였으니 술자리를 갖는 것은 꽤 오랜만이었다. 뭐가 그렇게 긴장이 되었는지 나는 장그래를 만나기 전 장백기를 붙잡고 소주 한 잔만 하고 들어가자고 애원했다. 빠르게 비운 소주 두 병 중에서 한 병 반이 내 목으로 넘어갔다. 그런 나를 두고 장백기가 아무 것도 묻지 않아줘서 고마웠다. 장그래를 보자마자 냅다 껴안은 것은 반쯤 술기운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답지 않게 장그래 앞에서 쭈뼛거렸을 지도 모른다.

 

"한석율 씨, 술 마시고 왔어요?"

 

메뉴판을 펼치던 장그래가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뭐 그럴 일이 있어서. 한숨을 담아 대답하자 메뉴판을 향해 있던 시선을 돌려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갑작스레 눈이 마주쳐 침을 꼴깍 삼켰다. 속을 읽는 것 같은 차분한 눈동자와 단정한 입매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퇴사 전 나를 피하던 장그래는 어디에 있을까. 그동안 연락도 없어 놓고는 바로 어제 만났던 사람처럼 나를 대하는 장그래는 잔잔한 물 같았다. 언제 일렁였냐는 듯이, 바람이 분 적 없던 것처럼. 그 표정에 걱정이 묻어나는 것을 보며 나도 모르게 눈가를 잔뜩 휘어뜨려 웃고 말았다. 상냥한 장그래 앞에서 무장해제 되지 않는 것은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다. 그런 나를 보고는 장그래도 픽 웃고 말았다.  

 

맥주를 몇 모금 들이키자 술기운이 더 빠르게 올랐다. 넷 중에서 나만 혼자 취해있는 것 같았지만 이미 어쩔 수 없었다. 장그래를 보고 신난 입이 제멋대로 떠들어댔다.

 

네 마음 속에서 이제 퇴근 하고 싶은데, 자꾸 야근을 하게 되네.
장그래 말해 봐. 나는 네 마음 속에 어떤 직급이야. 어? 뭐 사원이야 대리야 뭐야.
장그래. 회사라는 곳이 네 마음대로 들어가고 나올 수 없는 곳이잖아. 마치 너에 대한 나의 사랑이 마음대로 들어갔다 나올 수 없는 것처럼.

 

내가 생각해도 오늘 나는 조금 이상했다. 지치지 않고 장그래에게 사랑 고백에 가까운 말을 늘어놓는 나를 보며 안영이와 장백기가 한 마디씩 핀잔을 줬다. 그만 좀 해요. 한석율 씨, 그만 하시죠. 결국 장그래는 그만 말하라는 의미로 내 입에 과자를 하나 물려 주었다. 장그래의 손목을 붙잡고 나는 알았다는 제스처를 취했고, 우리는 마주보며 웃었다. 내가 내뱉은 장황한 단어들은 웃음 소리와 함께 의미 없이 흩어졌다. 그 정도의 무게 밖에 되지 않는 말들이었다. 그 안에 진심이 얼마나 담겨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재미 없어? 하며 내가 웃으면 그저 농담이 되는 말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더욱 아무런 말이나 할 수 있었다. 나는 조금 취했고, 늘 그렇듯 장난이 심한 사람이며, 이제 우리는 같은 회사가 아니니까.

 

내일부터 나는 다시 장그래를 볼 수 없다. 나는 장그래가 없는 네모난 건물로, 장그래는 아마 해커스 따위의 학원으로 각각 향하게 되겠지. 앞으로도 내가 장그래에게 쉽게 먼저 연락할 수 없을 거란 걸 안다. 어쩌면 또 오랫동안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를 장그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고, 네 얼굴은 참 멀쩡해 보인다고, 네가 없는 원인터가 얼마나 따분하고 삭막한 곳인지 아느냐고 말이다.

 

 

 

 

 

막차가 아슬아슬한 시간이었다. 그리 많이 마시지 않은 안영이와 장백기는 각각 버스 정류장과 지하철 역 쪽으로 향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들과 인사를 하고 장그래와 나는 다른 방향의 버스 정류장으로 터벅터벅 걸었다. 초여름의 바람은 늦은 밤이 되어도 미적지근했다. 장그래는 시계와 버스 노선을 번갈아 보면서 막차가 지나갔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나를 흘긋 보며 한석율 씨는 뭐 하냐는 눈빛을 보내온다. 얼른 핸드폰을 꺼내서 버스를 찾는 시늉을 하는데 장그래의 목소리가 들렸다. 막차 일분 남았네요. 한석율 씨는요? 가슴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장그래의 손목을 잡았다. 장그래, 나랑 한 잔 더 하고 갈래.

 

"왜요?"
"그냥, 오랜만이잖아."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장그래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눈이 말똥말똥한 장그래는 손목을 비틀며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장그래는 늘 이렇다.

 

"아저씨, 이미 많이 취하셨어요. 빨리 들어가셔야죠."

 

잠시간 맞닿은 체온이 아쉬웠다. 단정한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장그래의 눈빛은 평온했다. 그 상냥함에 나는 울고 싶어졌다. 그리고 장그래는 곧 도착한 버스를 탔다. 버스의 뒤꽁무니가 사라지고 정류장에 홀로 남은 나는 고개를 숙여 장그래에게 닿았던 손을 천천히 쥐었다 폈다. 술기운을 빌려도 나는 장그래에게 닿지 못했다. 술을 조금 더 먹고 막무가내로 잡아야 했을까. 헛웃음이 나왔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다음에 오는 버스를 타면 나는 집으로 갈 수 있었다. 망설이다 저 멀리 다가오는 불빛에 손을 들었다.

 

 

 

 

 

*

 

 

 

 

 

버스에 올라타 뒷자리로 걸어가자 창 밖으로 한석율의 얼굴이 보였다. 자리에 앉아 홀로 생각에 잠겨 있는 한석율의 얼굴을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울고 싶은 표정을 지었던 한석율. 조금 취해 보였지만 그는 각종 폭탄주에 단련된 사람이니까 괜찮을 것이다. 그래도 걱정스러운 마음은 감출 수 없었다. 다행히 한석율은 내 쪽을 보지 않았다. 그리 사람이 많지 않은 버스는 곧 출발했다. 덜컹거리는 창에 머리를 기대며 눈을 감았다.

 

한석율은 참 여전했다. 사람 놀라게 하는 갑작스런 스킨십도 그렇고, 남녀 사이에 주고 받을 법한 말들을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내게 늘어놓는 것도 그랬다. 술기운에 촉촉하게 물기 어린 한석율의 눈빛은 집요하게 나를 향해 있었다. 그 시선을 오롯이 받아내는 것도 새삼스럽게 어려운 일이란 걸 느꼈다. 안영이와 장백기가 그 자리에 함께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나는 그저 그들과 함께 한석율에게 그만 하라는 한 마디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한석율도 눈을 곱게 접으며 내가 좋아했던 그 시원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 한석율에게 나는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다. 술은 왜 마시고 왔는지, 오늘따라 당신은 왜 내게 자꾸 짓궂은 말을 하는지, 당신이 없는 일상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느냐고 말이다.

 

회사에서 나가기 전 한석율은 나를 과하다 싶을 정도로 신경 썼다. 원래도 나를 엄마처럼 챙겨 주던 사람이었지만, 장난기 보다는 다정함으로 무장한 한석율은 전처럼 쉽게 쳐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바쁜 와중에도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는지 발로 뛰며 찾아다녔다. 틈틈이 나에게 건강 식품이나 간식거리를 사다 주기도 하고, 늘 내 표정을 살피며 기운을 돋우려 애썼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어느 때보다 다정했고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은 따뜻했다. 가만히 가라앉는 나를 끌어 올리려고 한석율은 그렇게 무던히 애를 썼다. 나를 짓누르는 여러 상황에 지쳐 있던 나에게 자꾸만 다가오는 그를 거부하기란 쉽지 않았다. 물렁해진 나는 곧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해졌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 몫이 아닌 것에 욕심을 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나를 안고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품이 너무 안락해서 이 곳을 떠나기 싫어졌다. 한석율이 없었다면 나는 원인터에 대한 미련을 조금 더 빨리 버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마음 한 구석에 구겨 놓은 감정이 고개를 내민지도 오래였다. 회사에서 한석율의 얼굴을 볼 때면 나는 그를 붙잡고 칭얼거리고 싶어졌다. 한석율 씨, 나 힘들어요. 같이 술을 먹고 어리광 부리고 싶어졌다. 일상을 이야기하고, 그와 함께 더 오래도록 있고 싶었다. 나는 그에게 더 많은 걸 기대고 싶었다.

 

나에게 한석율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게 했다. 그는 누구에게나 다정한 사람이었다. 얼마 있지 않으면 내게서 사라질 것들에 미련을 갖는 스스로가 나약하고 못나게만 느껴졌다.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려 옥상에 올라갔던 어느 날, 나는 한석율과의 기억들을 떠올리다 울컥 울음이 터졌다. 그 정도로 나는 너무 허물어져 있었다. 애초에 한석율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어야 했다. 더 이상 감상에 젖고 싶지 않았다. 볼을 적시던 눈물은 뭉근한 봄 바람에 금세 차게 말라붙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한석율을 피하기 시작했다. 안영이나 장백기와는 오다가다 몇 마디 대화라도 나누었지만 한석율을 만나는 것은 의식적으로 피하게 되었다. 그것이 내가 가장 익숙한 욕심을 내려놓는 방법이었다. 

 

 

 

 

 

*

 

 

 

 

 

집 앞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만났다. 죄스러운 마음에 연락을 드릴 수 없었던 오 차장님이 밤 늦게까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마시지 않은 술이 번쩍 깨는 기분이었다. 차장님은 감사하게도, 나를 당신의 회사에 스카웃하겠다는 말을 직접 전해주러 왔다고 했다. 눈물을 꾹 참으며 웃었다. 조금은 두려웠던 새로운 시작을 차장님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아서 자꾸만 눈을 깜박였다.

 

높고 가파른 골목을 올라온 차장님을 다시 데려다 드리며 우리는 그동안 하지 못한 긴 대화를 나누었다. 죄송하다는 말을 먼저 꺼냈다가 머리통을 한 대 얻어맞기도 했다. 말로만 죄송하다고 하지 말고 직접 몸으로 뛰면서 열심히 해 보라는 차장님의 말에 나는 머리를 문지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차장님은 내일 회사에 와서 근무 조건을 다시 확인하라고 했다. 슬그머니 저는 4대 보험만 되면 됩니다. 차장님과 함께라면 어디든 꽃밭, 까지 말하다 한 대 더 맞을 뻔 한 것을 날래게 몸을 뒤로 빼며 피했다. 저 놈 자식, 능청만 늘어가지고. 나를 타박하는 오 차장님의 목소리에도 웃음이 묻어 있었다.

 

차장님을 어느쯤까지 배웅하고 얼른 들어가라는 손짓에 고개를 꾸벅 숙였다. 멀어지는 차장님의 뒷모습을 보다가 나는 기분 좋게 뒤를 돌았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적거려 여러 번 진동을 느꼈던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차장님과 이야기 하면서 걸어오느라 미처 신경 쓰지 못한 핸드폰에는 부재중 전화가 여섯 통이나 와 있었다.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하고 나는 걸음을 멈췄다. 전부 한석율이었다. 마지막으로 온 전화는 10분 전이란 걸 확인하고 바로 전화를 걸었다. 한석율은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통화 연결음이 얼마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가만히 귀에 댄 핸드폰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통화가 연결되어 있는 화면을 다시 확인하고 한석율 씨, 한석율 씨. 몇 번을 불렀지만 반대 편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정류장에서 조금 취해 있었던 그의 모습이 생각나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지 걱정스러웠다. 핸드폰을 고쳐 잡으며 발을 동동 구르는데 한숨처럼 나지막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그래."

 

전화기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얼어붙어 고개를 돌리자 침침한 골목 한 켠에 거짓말 같이 한석율이 서 있었다. 언제부터 그 곳에 있었는지 모를 한석율은 왜인지 곧 울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우리 집도 아니고 여러 갈래의 골목 중 하나일 뿐인 그 곳에 한석율이 있다는 것이 나는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졌다. 멍하게 입을 벌리고 그와 눈을 마주쳤다. 한석율은 아무 말 없이 걸어와 나를 한품에 안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내 등과 어깨를 힘주어 끌어안는 한석율을 나는 밀어내지 못했다. 방황하던 손을 조심스레 그의 허리에 올렸다. 그의 옅은 카키색 셔츠를 만지작거리며 나는 그가 왜 이 곳에 있는지 생각했다.

 

한석율은 내가 사는 동네를 알고 있었다. 언젠가 내가 가장 힘들어 하던 시기에, 나 혼자 만취했던 술자리에서 한석율이 이 골목까지 나를 끌고 온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취기를 빌어 그에게 어린애처럼 응석 부렸고 한석율은 말 없이 나를 챙겨 주었다. 집 앞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그에게 바락바락 난동을 부리며 기어코 그를 중간에 떼어 놓고 왔던 것 같다. 드문드문 끊겨 있는 필름 속의 한 장면이 불현듯 떠올라 몸을 떨었다. 그 때도 이 골목 어딘가에서 한석율이 나를 말 없이 끌어 안았었다. 지금처럼. 그리고 아무 것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보고 싶었어."

 

가라앉은 한석율의 목소리에 눈을 꾹 감았다. 나는 정해진 답을 원하는 사람처럼 그에게 묻고 싶었다. 여기엔 왜 왔습니까. 왜 나를 안았습니까. 그렇게 한석율에게 배턴을 넘기는 것이 여태 내가 해 오던 방식이었다. 방어적인 태도는 스스로의 마음을 다잡는 것에 탁월했다. 하지만 한 발 떨어져 보니 그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있었다. 맞닿은 심장이 나만큼이나 빠르게 뛰고 있었다. 나를 안은 한석율의 몸이 고요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취해 있을 때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가만히 어깨를 밀어내자 앞머리가 잔뜩 헝클어진 한석율이 고개를 들었다. 멍하게 눈을 깜박이는 모습이 꼭 비를 잔뜩 맞은 강아지 같다고 생각했다. 옅은 불빛 아래 반짝이는 눈에는 물기가 가득했다. 나를 원하는 그의 눈을 이렇게 오랫동안 바라본 적이 있었을까.

 

어쩌면 나는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부터 나에게 대가를 바라지 않는 호의를 베풀던 한석율을, 장난스럽게 사랑한다는 말을 건네고 내 표정을 살피는 한석율을, 나를 보면 눈이 커지며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한석율을, 나는 외면했었다. 그의 눈에서 읽히는 감정과 가능성을 모른 척 했다. 헛된 기대를 품는 것이 그 무엇보다 겁이 났던 나는 그의 행동에서 의미를 지우려고 노력했다. 그를 앓는 것은 내 몫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했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한석율을 내게서 밀어내고 뒷걸음 치는 동안, 그래서 정작 그가 어떤 마음이었을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한석율에게 이런 표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흐트러진 얼굴이 가슴 아팠다.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입을 열었다. 좋아해요, 한석율 씨. 그가 잘 들을 수 있게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좋아합니다. 나의 말에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가득 고여 있던 눈물이 약속한 듯이 후두둑 떨어졌다. 젖어가는 볼을 감싸며 나는 한석율에게 입을 맞췄다. 맞닿은 입술이 축축했다. 울지 마요, 조용히 속삭이자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한석율은 한참 동안 나를 놓지 않았다. 그의 품 안은 여전히 따뜻했다. 이렇게 한 걸음만 다가가면 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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