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을 들이민다. 그 사람은.

 

석율이 손을 흔들며 탕비실을 빠져나간 후 그래는 입술을 깨물며 낮은 한숨을 흘렸다. 한참 동안이나 엉덩이를 들썩이며 기분 좋은 티를 내길래 무슨 일인지 물어본 것이 잘못이었다. 대뜸 손목을 잡아끌고 자기 가슴에 갖다 대질 않나, 심각한 말이라도 할 것 같은 표정으로 이 안에 사표 있다는 헛소리를 해 대질 않나.

 

뜬금 없이 걸려온 장백기와의 통화 내용이 궁금해 슬쩍 호기심이 발동한 것도 문제였다. 생각 외로 친해 보이는 둘의 모습에 궁금증을 숨기지 못하고 뭐에요? 하고 물어 보니 갑자기 깜짝 놀랄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었다. 그의 일방적인 스킨십은 너무 잦아서 이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건만, 이렇게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훅 들어올 때면 몸이 빳빳이 굳어 제 스스로가 멍청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경직된 상태로 눈만 깜박이는 제게 석율은 비밀,이라며 가볍게 손을 흔들고 사라졌다. 왜인지 뭔가 농락이라도 당한 것 같은 기분에 심술이 났다.

 

그래서 무슨 얘기인데. 전화 너머로 얼핏 부탁합니다, 하는 다급한 장백기의 목소리가 들린 것을 기억한다. 언제 그렇게 친해졌지. 짜증이 난다. 근데 짜증이 날 건 또 뭐야. 둘이 친해지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얄미운 얼굴을 생각하며 입술을 부루퉁 내밀고 입을 삐죽거리던 그래는 곧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허튼 생각은 날아가란 듯이.

 

 

 
석율은 탕비실을 나서며 얼굴에 가득한 웃음을 숨기지 못하고 입가를 실룩거렸다.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완벽주의자 같던 장백기의 매우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한 것도 신이 나는데, 다름 아닌 장그래가 방금 전 제게 보였던 반응들이 귀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오, 미치겠다. 저걸 언제 어떻게 잡아 먹지. 장백기와 통화하는 내내 나 궁금해요 하는 표정으로 곁눈질을 하더니, 한석율의 모든 것에 관심 없어보였던 장그래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본 거다. 게다가 놀려주려고 짓궂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더니 눈에 보이게 숨을 참으며 파르르 떨리던 눈꺼풀까지.

 

장그래는 늘 그렇다. 제가 귀찮을 정도로 치댈 때마다 눈썹을 구기며 저리 가라고 밀어내지만, 밀어내는 그 손에 그리 많은 힘이 실려있진 않다. 자신이 다시 한 번 건드리면 못 이기는 척 가만히 끌려오기도 한다. 귀여워 죽겠다니까. 인간 장백기의 간절한 부탁이 아니었다면 그는 방금 전 탕비실에서 장그래의 뒷목을 당겨 입술을 맞대보았을지도 모른다. 뺨 한 대 맞으면 어때. 한 번 더 하면 되잖아. 그래 안그래 장그래.


 

 

*

 

 

 

하루종일 성대리에게 시달린 석율의 발걸음은 급하게 탕비실로 향했다. 오늘은 되는 일이 없다. 아침에 장백기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혼신의 연기력을 발휘했던 것은 그놈의 강대리님 앞에서 전부 삽질이 되어버렸고, 성대리 놈은 여전히 제게 일을 떠맡기며 입만 살아있다. 저 놈의 자식한테 하루빨리 선빵을 날려줘야 하는데. 우리 장그래 처럼 말야. 흐흐. 속은 부글부글 끓지만 장그래를 떠올리니 입이 웃고 있었다. 장그래의 그런 모습은 아마 나만 봤을 거야.

 

바보 같은 표정으로 탕비실에 들어서는데 마침 커피를 여러 잔 타고 있는 장그래가 보였다. 장그래애! 반가운 마음에 두 팔을 벌리며 달려들자 그래는 또 눈썹에 힘을 주며 뒤로 물러선다. 석율은 알았어 알았어, 손으로 제스처를 취하며 커피믹스를 하나 꺼내들었다. 룰루루. 흥얼거리며 커피 타는 장그래의 말간 옆모습을 은근하게 감상한다. 속눈썹 되게 기네.

 

커피를 휘휘 저으며 생각에 잠겨있던 그래가 석율을 힐끔 보고는 흠칫 놀라며 다시 시선을 거둔다. 우물쭈물 하는 것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눈치다. 석율은 그것을 단숨에 캐치하고 그래의 옆으로 슬쩍 다가섰다.

 

"장그래, 뭐야. 뭐 할 말 있어?"
"저기, 한석율 씨. 아까 장백기 씨 일.. 뭐였습니까?"

 

아침부터 못내 궁금했던 것인지 쿡 찌르자 바로 질문이 나온다. 장그래의 시선은 여전히 저를 쳐다보지 않고 커피를 향해 있다. 석율은 입가에 슬금슬금 피어오르는 웃음기를 숨기려 입술을 깨물었다.

 

"궁금해? 이리 가까이 와 봐."

 

손으로 까딱 까딱 하는데 장그래는 고개만 돌려 쳐다볼 뿐 미동이 없다. 안 오면 내가 가지 뭐. 아침에 그래에게 다가갔던 것처럼, 석율은 그래의 영역으로 성큼 들어섰다. 그래가 미처 놀랄 틈도 없이 입술이 닿았다. 뒷머리를 잡는데 바로 가슴팍이 밀쳐졌다. 뭐 하는 겁니까? 격앙된 목소리에 석율은 두번째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며 웃었다. 쉬이, 밖에 들려요.

 

잔뜩 인상을 쓰고 있지만 그래의 귀가 발갛게 달아오른 것이 눈에 들어왔다. 석율은 뺨을 맞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한 번 그래의 얼굴로 다가갔다. 제 입술이 다가오자 흡, 숨을 참으며 눈가가 바르르 떨리다 꾹 감겨진다. 말캉한 입술을 맞대고 제 몸을 미는 두 팔을 붙잡았다. 잔뜩 놀라 경직된 그래의 몸을 벽으로 기대게 하고 입술 새로 혀를 밀어넣었다. 장그래는 다시 온 몸을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한참 동안 씨름하다가 정강이를 퍽 걷어차이고서야 석율은 떨어져나갔다. 아이고, 장그래. 너무 아프다아.

 

"미친 거 아닙니까?"

 

손등으로 입을 가린 채 씩씩거리는 장그래는 얼굴 전체가 귀와 같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입술을 깨물며 나가려는데 석율이 팔을 붙잡았다. 장그래, 당신 지금 얼굴 색 좀 봐. 그리고 커피 가져가야지. 그래는 석율을 노려보며 석율이 잡은 팔을 매정하게 뿌리쳤다.

 

 


 
"두 분 여기 계시네요?"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석율과 그래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았다. 영이가 눈을 깜박거리며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네에. 영이씨 또 보네요. 그럼 다음에 또 봐요. 그래는 고개를 숙이며 서둘러 커피 잔을 챙겨 빠른 걸음으로 탕비실 밖으로 나섰다. 걸음을 옮기는 그래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한석율과 그 난리를 치느라 몸에 힘이 다 빠진 것 같았다. 개자식.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제 질문에는 대답도 안 해줬으면서. 맞닿았던 입술의 감촉이 생각나 머리가 어질했다.

 

 

탕비실에 남겨진 석율은 영이의 의아한 눈빛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익살스런 웃음을 지으며 커피 믹스의 입구를 뜯었다. 그래 씨가 많이 바쁜가 봐. 여유롭게 눈을 찡긋 하며 커피를 젓는 석율의 뒤통수로 영이의 시선이 따라붙는 것이 느껴진다.

 

"장그래 씨 얼굴 되게 빨갛네요. 뽀뽀라도 한 사람처럼 말이에요."

 

영이의 말에 석율은 한 입 머금은 커피를 푸왁 내뱉었다. 영이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뭐에요, 왜 그렇게 당황해요.

 

"아니, 영이씨. 하하하. 안 그렇게 봤는데 되게 개방적이시네."

 

석율은 마시던 커피를 들고 황급히 탕비실을 나섰다. 그 와중에 우리 영이씨도 힘내요, 치얼스. 하는 여유는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