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율 씨."
"응. 우리 장그래 씨 왜."
"저... 아까 아침에 한석율 씨랑 똑같이 생긴 사람 봤습니다."
"뭐?"
이걸 한석율에게 왜 이야기 하고 있는 걸까, 의문이 들었지만. 어쩐지 무슨 말이라도 들어줄 것 같은 석율의 얼굴을 마주하자 저도 모르게 덜컥 말을 시작해버렸다. 한번 열린 입은 석율에게 아침에 있던 일을 줄줄 꺼내놓는다.
그게 그러니까, 한석율 씨랑 얼굴이랑 목소리가 똑같더라고요. 머리는 짧은데, 서울역에 내리길래 한석율 씨 인줄 알고 말 걸었는데, 아, 아니 그래서 혹시 한석율 씨가 아는 사람은 아닌가 해서요.
석율에게 이렇게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적이 별로 없어서인지 말이 그닥 정돈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말이 자꾸 길어지는 건, 이 사람은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다. 독심술사 마냥 제 속을 꿰어 보기도 하고, 원인터의 별 같잖은 소식도 죄다 손에 쥐고 있는 한석율 아닌가.
석율은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이다.
"음... 장그래. 주말에 나 되게 보고 싶었구나?"
"예?"
"에이, 말이 돼? 이런 얼굴이 세상에 또 있을 수가 없잖아. 장그래가 내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니까 그런 걸 보는 거야. 장그래 안 그렇게 봤는데 사실 나 엄청 좋아하네? 응?"
"됐습니다."
역시 괜히 이야기 했다. 저 인간한테 뭘 바라고. 그래는 제 어깨를 감싸며 잔뜩 신난 웃음을 짓는 석율을 떼어내고 한숨을 폭 내쉬었다.
*
또 그 남자다. 여전히 잔뜩 쌓여있는 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틀 연속 지하철로 출근하게 된 그래는, 오늘도 같은 칸에서 어제의 그 남자를 마주쳤다.
아... 어째 보면 볼 수록 똑같이 생겼다. 한석율도 저렇게 머리 자르면 더 잘생.. 아니, 잘생긴 게 아니고. 좀 분위기 있을 거란 말이지.
그래는 어제 들었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분명 같은 목소리인데 한 쪽은 가볍고 통통 튀는 대사를 리드미컬하게 읊는 반면, 다른 한 쪽은... 아, 그 목소리를 떠올리니 절로 마음이 서늘해진다. '아닌데요.' 바짝 날이 선 낮은 목소리. 귀찮은 잡상인을 바라보는 듯한 눈빛. '한..한석율 씨 아니에요?' '사람 잘못 보셨습니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멍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혹시 뭐, 잃어버린 쌍둥이 동생이라도 되는 거 아냐. 아니면 사실 한석율이 맞는데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아침마다 위장을 하고 이중 생활을 한다거나... 이게 무슨 드라마 같은 생각이야. 상상 끝에 그래는 픽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어버렸다. 멍하게 서 있다 혼자 실실 웃는 그래를 보며, 그래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수상한 눈초리와 함께 그래에게서 슬쩍 물러섰다. 주변의 시선을 느끼곤 다물어지지 않는 입술에 애써 힘을 주는데, 그래가 곁눈질로 자꾸 쳐다보았던 그 남자가 별안간 그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헙. 그래는 웃고 있던 얼굴이 박제된 채로 남자의 눈과 마주쳤다. '당신들은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아?' 언젠가 들었던 한석율의 목소리가 귀에 왕왕 울리는 듯 했다. 마주친 것은 순간이었지만 제 머릿속의 생각을 들킨 것만 같아 얼굴이 확 달아오른다. 그래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도록도록 굴렸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 가지고 제멋대로 상상하고 있던 스스로가 민망해진다. 아... 뭐라고 변명 하고 싶은데. 말을 건네기엔 너무 멀고, 신경쓰지 않기엔 너무 가까이에 있다.
이번 역은 서울역, 서울역 입니다. 내리실 문은... 우르르 밀려 나오는 인파 속을 빠져나오다 보니 남자의 등은 저 멀리 멀어져 있었다. 붙잡고 뭐라 한 마디라도 해야 하나. 근데 무슨 말을 해. 웃어서 미안합니다? 아니, 말을 거는 게 더 이상하다. 어제처럼 흡사 사이비 종교나 권하는 사람처럼 비춰질 수도 있는 일이다.
입을 삐죽이며 고민하는 사이 남자의 모습은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그래는 작게 숨을 내쉬고 멍청히 서 있던 발걸음을 옮겼다. 왠지 오늘은 한석율에게라도 친절하게 대해 줘야 할 것 같은 날이다.
*
한동안 그래는 지하철을 타지 않았다. 제 집에서는 지하철 역보다 버스 정류장이 훨씬 가깝기도 하고, 지하철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을 그닥 좋아하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회사 생활에 적응하면서 점점 아랫배가 통통해 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래도 편한 길을 택하게 되는 제 몸은 어쩔 수 없다.
그렇지만 오늘 같은 날은 예외다. 지난 겨울처럼 온 거리를 덮는 폭설이 내리거나, 오늘처럼 우산을 뚫을 것처럼 굵은 장대비가 내리는 날. 버스나 지하철이나 젖은 우산을 들고 찝찝하게 몸을 구겨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빗길에 엉금엉금 기어가는 버스는 사양이다. 저절로 발걸음은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접어 들고 지하철을 기다리며 그래는 잠시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몇 개월 전에 만났던 익숙하지만 낯선 얼굴.
얼마 전 머리를 싹둑 자르고 나타난 석율 때문에 그래는 정말 기절할 듯이 놀랐었다. 머리를 단정히 정리하고 차분한 옷을 입고, 말이 없어져 다른 사람이 된 석율은 언젠가 제가 지하철에서 마주쳤던 그 남자와 정말 똑같은 얼굴이었다. '한석율 씨.' '응, 장그래.' 가라앉은 목소리 마저도 전부. 그렇지만 예의 지하철에서 만난 남자 이야기를 석율에게 꺼낼 수는 없었다. 사실 기억이 조금 가물가물 해지기도 했고, 그런 농담 같은 이야기를 석율에게 할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그저 그 때의 그 남자가 진짜로 한석율 아니었을까, 혼자 고개를 갸웃거렸을 뿐이다.
문득 시선을 느꼈다. 그래가 고개를 들자 서너 명의 사람을 사이에 두고 그 남자가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휙 고개를 돌렸지만 그래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한석율 처럼 생긴, 그러나 한석율은 아닌 남자. 그래의 머릿속이 마구 엉클어진다. 정말 한석율이 아닌 걸까. 이번에는 한석율 아닐까. 석율이 제가 타는 지하철에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남자는 어제 만나서 인사했던 석율과 너무 똑 닮아있었다.
혹시 예전의 일이 한석율의 짓궂은 장난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다. 그때 자신은 너무 쉽게 수긍하고 넘어갔었는데, 생각해 보니 한석율이라면 그런 장난을 치고도 남을 사람이다. 그래, 저렇게 닮은 사람이 하필 서울역에서 내릴 일이 없잖아.
그래는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타다다 달려가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한석율 씨!"
흠칫 놀란 남자가 그래의 얼굴을 보더니 파드득 팔을 떼어낸다.
"한석율 씨 맞죠. 왜 지난 번에는,"
"아니라고 했잖아요."
말문이 막혔다. 아... 맞는데. 이 얼굴, 이 목소리. 한석율 맞는데 왜 아니라고 하지. 그래는 울상이 되어 뻗었던 팔을 내렸다.
그러고보니 어제의 석율과 조금 달라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얼굴, 머리 스타일, 목소리, 전부 같은데...
그런데 어딘가 다르다. 생기 없는 눈빛이, 무감하고 냉기어린 표정이, 그리고 자신에 대한 경계가. 경계.
확실해졌다. 이 사람은, 한석율이 아니다.
그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눈 앞의 사람이 석율이 아니라는 것도 혼란스럽지만, 남자의 눈에 제가 얼마나 이상하게 비출까 싶어 얼굴에 열이 올랐다. 지난 번엔 몰래 쳐다보면서 혼자 웃다가 들키지를 않나, 두 번이나 붙잡고 다른 사람 이름을 부르질 않나.
그래는 남자가 떠나버리기 전에 얼른 입을 열었다.
"아, 저기, 죄송합니다. 제가 아는 사람이랑 너무 닮아서요, 지난 번에도 제가,"
"...나한테 관심 있어요?"
"예?"
그래는 얼빠진 소리를 냈다.
"핸드폰 줘 봐요."
"네? 아... 네. 네."
남자는 그래가 얼떨결에 내민 핸드폰을 낚아채고 번호를 꾹꾹 누르더니 통화 버튼을 눌렀다. 몇 번 신호가 가자 전화를 끊고 다시 그래에게 내민다. 그래는 눈을 깜박거리며 남자의 행동을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그러니까, 이게 뭐...
"박정구."
"...네."
낯선 이름이 귀에 울린다. 박정구.
"이런 작업은 또 처음이네. 그쪽은 이름이 뭐에요?"
"어... 장그래, 장그래요."
"연락 할게요."
어깨를 툭 치고 돌아서는 정구의 뒷모습을 멍하게 바라봤다. 내내 무관심해 보이던 얼굴이 픽 웃었던 것 같기도 하다. 스르륵 어깨에서 내려오는 가방을 추스려 메고 그래는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박정구인지 한석율인지 모를 얼굴이 머릿속에 동동 떠다닌다. 관심.. 작업.. 연락 할게요.. 이게 뭐지. 정구의 말을 한마디 한마디 곱씹는 그래의 귀가 붉었다.
정구는 부재중 전화에 찍혀 있는 번호를 꾹 누르곤 손가락을 움직였다. 장그래. 특이한 이름이네. 이름을 저장하고는 주머니에 핸드폰을 집어 넣는다. 당황해서 어버버 하던 바가지 머리를 생각하니 갑자기 입에서 웃음이 샜다. 한석율인지 뭔지 하는 이름을 부르며 접근한 그가 어떤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사실, 다시 못 만날 줄 알았다.
몇개월 전 마주쳤던 해사한 얼굴. '한석율 씨 머리 잘랐어요?' 말똥말똥한 악의 없는 눈동자. '무슨 일 있었습니까?' 순간 걱정이 비치는 선한 눈빛. 정구는 한 눈에 그가 자신과 동류의 사람이 아님을 알았다.
속에서부터 치솟는 거부감에 가시돋힌 목소리로 내치고 돌아서긴 했지만, 왜 하루종일 그 얼굴이 눈 앞에 어른어른 거렸는지는 알 수 없다.
'형,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가자.' 언젠가 제 삶 속으로 망설임 없이 걸어들어왔던 누군가가 떠올라서 였을 수도 있다. 어쩌면 삶에서 유일했던 온기를 제 손으로 지워낸 기억이.
다음 날 맹하게 웃고 있는 남자와 다시 눈이 마주쳤을 때, 머릿속이 한층 더 복잡해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분명 자신을 보면서 웃고 있었다. 그 날 이후로 정구는 아침마다 자꾸만 지하철 안을 두리번거리며 하얀 얼굴을 찾았다. 늘 같은 시간대에 지하철을 타는데도 다시 마주칠 수 없어서, 제가 헛것을 본 건 아닐까 싶기도 했었다.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었다. 오늘 그 얼굴을 다시 보았을 때, 반가운 기분이 먼저 들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하겠다. 정구는 오랜만에 만난 그의 얼굴을 꼼꼼히 훑었다. 뭐 하는 사람일까. 이 지하철을 타긴 타는구나. 나를 기억할까. 전에도 느꼈지만 눈코입이 정갈하고 오밀조밀 한 게.. 이런 말 하긴 좀 그런데 예쁜 것 같기도 하고.. 그렇게 얼굴을 뜯어보다 눈이 마주쳐 얼른 시선을 돌렸다. 민망하긴 했지만 지난 번에 그 남자도 저를 쳐다봤으니 이 정도는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팔을 덥썩 붙잡아 올 줄은 몰랐다. '한석율 씨!' 눈 앞에 서 있는 말간 눈동자를 보며, 정구는 제멋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당신이 날 붙잡은 거야.
걸음을 멈춰선 정구는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다시, 언젠가처럼, 멍청한 말 한 마디에도 웃게 될 수 있을까.
목 빠지게 지하철 안을 들여다보며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사이가 되진 않을 거다. 정구는 핸드폰을 꺼내들고 자판을 꾹꾹 눌렀다.
박정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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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붕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