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2시. 가만히 눈을 떴다.
어째 좀처럼 잠이 들지 않는다. 그래는 뒤척거리던 몸을 일으켰다. 요즘들어 자주 겪는 일이다.
서랍 구석에서 언젠가 처방받은 신경안정제를 꺼내들었다. 부엌에서 살금살금 물을 꺼내와 여러 개의 알약을 한 번에 집어삼킨다.
목이 까끌하다. 잠들고 싶다.
오전 4시. 여전히 뜬 눈으로 가만히 누워 있다.
속이 메슥거리는 것 같아서 아까 화장실도 다녀왔다. 헛구역질을 해 보았지만 나오는 것은 없었다.
그래는 자리에 누워 핸드폰을 뒤적거린다. 불면증, 어지러움, 가슴떨림 따위를 검색해 본다. 몇 가지 글을 클릭해 보다가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오지 않는 잠을 청하지만 잠이 들리 없다.
아무에게나 전화 하고 싶었다. 있잖아, 나… 로 시작하는 긴 이야기를 풀어놓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전화를 걸어 잠을 깨운다면 한 대 맞기라도 할 것 같은 시각이다. 그래는 동이 틀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보기로 했다.
오전 5시. 인터넷으로 24시간 상담 센터의 전화번호를 검색한다.
예전에는 이런 걸 이용하는 사람들의 심정을 몰랐는데. 그래는 이제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누구라도 붙잡고 말하지 않으면 정말로 정신이 이상해 질 것 같았다.
정신건강 상담센터. 번호를 찾았지만 막상 전화를 하려니 망설여진다. 나 같은 사람이 전화 해도 되나. 나는 그저, 잠이 안 오고, 불안하게 가슴이 쿵쿵거리고, 그냥 그럴 뿐인데. 그래는 번호를 찍어 놓고도 베개 옆에 두고 한참 동안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용기를 내 전화를 걸어봤지만 허무하게도 통화중이다. 1분 뒤 다시 전화를 걸었다. 또 통화중. 세 번째, 네 번째 도전도 실패했다.
그래는 이 시간에도 잠들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괜한 오기가 생겨 그래는 계속 전화를 걸었다.
오전 6시. 전화가 연결됐다.
- 네.
"…저기요."
- 네, 말씀하세요.
"제가…. 가슴이 답답해서요."
- 네.
내가 왜 이럴까요, 묻고 싶다. 하지만 그건 전화기 너머의 그녀가 알 바 아니겠지.
"…."
- ….
"…죄송합니다. 수고하세요."
역시 전화를 하는게 아니었다. 못된 짓을 한 것처럼 가슴이 쿵쿵거렸다. 그래도 아직 밖은 새까만 어둠이다.
오전 7시. 다시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저장된 번호 목록을 쭉 훑어본다. 그리 많지 않은 목록의 끝에서 화면을 만지작거리던 손가락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이건 안 돼.
한 번 생긴 충동은 자꾸만 손을 움직이려 한다. 이 시간에 전화라니. 주말 아침부터 회사원을 괴롭히는 건 정말 못 할 짓이다.
게다가 뜬금없다. 그와 개인적으로 연락하지 않은 지 몇 개월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 동안 그에게서 몇 번이나 전화가 왔었지만 그래는 받지 않았다. 바빠서 못 받았다며 미안하다는 내용의 문자를 보내는 것으로 대신했다. 그렇게 같은 일이 반복되자 간간이 걸려오던 전화는 어느 순간 오지 않았다.
그래는 못 본척 핸드폰을 멀리 치웠다가 다시 손 안에 가져오기를 반복했다.
오전 8시. 손가락이 멋대로 그의 이름을 눌렀다.
아차 싶었을 때는 이미 통화 연결음이 울리고 있었다. 화면에 떠 있는 그의 이름을 멍하게 바라본다. 지금이라도 꺼야 할까.
- 장그래?
"…."
- 그래야?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그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어제 통화한 사람처럼 지극히 편안한 목소리다. 막상 석율의 목소리를 듣게 되자 그래는 입이 달라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핸드폰이 뭐라도 되는 것처럼 움켜쥐고 몸을 둥글게 웅크린다.
석율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주변이 시끌시끌하다. 원인 모를 겁이 덜컥 났다.
"…한석율 씨. 지금 통화할 수 있어요?"
- 응, 잠깐 잠깐만. 어 괜찮아. 웬일로 전화를 다 했어?
"그게요."
벌써부터 목소리가 갈라진다. 그래는 잠시 숨을 골랐다. 볼썽사나운 꼴을 보이고 싶진 않다.
"그냥 답답해서요."
목소리 끝에 물기가 어렸다. 이번에는 분명 석율도 느꼈을 것이다. 존나 병신 같아 장그래.
- 울지 말고.
"우는 거 아니에요."
- 알았어. 다 들어줄테니까 말 해봐. 뭐 속상한 일 있어?
"그게, 저 그냥 …. 잠이 안 와서요."
- 뭐야, 그러면 밤 샜어? 지금 아침 다 됐는데.
"네. 그러네요. 그렇게 됐네요."
다정한 목소리를 듣자 싸했던 마음이 점차 풀어진다. 그건 한석율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걸 그래는 알았다.
- 장그래 왜 청승 떨어. 지금 영화 속 주인공처럼 혼자 집에서 웅크리고 울고 있는거야? 응?
"우는 거 아니라니까요."
- 그럼 전화는 왜 했어. 무슨 사연인지 말 해봐. 우리 사연 많은 남자 장그래 씨.
뭐라도 말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는 조심조심 입을 뗐다.
"저 …가슴이 답답하고."
- 응.
"잠이 안 와요. 누워 있으면 가슴이 막 뛰어서 다시 일어났다가, 누웠다가를 반복해요."
다시금 목소리가 축축해진다. 그래는 스스로 합리화 해 본다. 나는 지금 잠도 못 잤고, 안 먹던 약도 먹었고, 그래서… 그래서.
그렇지만 결국 그에게 말 하지 못 할 것을 안다. 중심이 사라진 이야기는 맥락 없이 이어진다.
"눈 감으면 자꾸 지난 일들이 생각나는데… 후회하고, 자책하고."
- ….
"부정하고, 되돌리고 싶고…."
- ….
"나를 미워하게 돼요…. 병신 같고."
- 에이. 그런 말 하면 못써.
마지막 말은 집어 삼킨다. 나 사실 한석율 씨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오래 전에 말이에요. 속으로만 되뇌인다.
"나 지금 되게 이상하죠. 무슨 말 하는지 이해 안 가죠…."
- 아니. 누구나 그럴 때가 있잖아. 이해 해.
"무턱대고 전화해서 미안해요. 지금…,"
- 미안할 게 어디있어. 괜찮아.
"누구한테라도 털어놓고 싶었는데, 전화할 사람이 없어서…."
- 전화할 사람이 왜 없어. 나는 장그래가 이럴 때 나를 찾아줬다는게 좀…감동인데? 앞으로도 자주 전화 해.
전화 너머로 낮은 웃음 소리가 들린다. 오랜만이어도 당신은 변하는 것 없이 상냥하다.
"…고마워요."
- 그래. 지금 어디야. 집?
"네. 한석율 씨는요."
- 나 강원도. 멀리 있지? 내가 서울이었으면 지금 장그래 보러 갈 텐데.
"…."
- 수연이랑 같이 온거라 어쩔 수가 없다. 내일 밤에 잠깐 볼래?
그래는 핸드폰을 잠시 귀에서 멀찍이 떨어뜨렸다.
- 결혼하고 바빠서 둘이 멀리 나온 건 오랜만이거든. 새벽부터 운전했더니 벌써 강원도네.
"…."
- 그래야? 내일 볼까?
멀리 떼어내도 소리는 막지 못한다. 벌어진 입술이 바싹 말라 따가웠다.
"아니요… 저 괜찮아요. 저 그냥 지금 통화만 해도 돼요. 답답한 거 많이 나아졌어요."
- 그럼 다행이고. 앞으로도 전화 좀 해. 나 장그래 이름 뜬거 보고 진짜 놀랐다니까. 잘못 본 줄 알았어.
"네 그럴게요. 얘기 들어줘서 고마워요."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마무리를 서둘렀다. 그래야, 나 결혼해. 도망치듯이 자리를 빠져나온 언젠가처럼.
토기가 밀려온다. 머릿속으로는 남은 신경안정제의 개수를 헤아렸다.
- 근데 그래야.
"…."
- 정말 괜찮은 거 맞지?
그 때나 지금이나 제 거짓말은 형편없는 것이 분명하다.
"…네."
- 알았어. 나중에 봐.
"네. 한석율 씨도요."
그래는 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석율의 이름이 깜박거리던 화면은 이내 까맣게 빛이 사라진다. 핸드폰을 이불 위로 던져놓고 양말을 주섬주섬 꿰어 신었다. 미닫이 문을 열고 나오자 햇빛에 눈이 부시다.
회색 후드를 뒤집어 쓰고 그래는 찬찬히 걸음을 옮겼다.
마지막으로 본 당신의 웃는 얼굴. 까마득히 먼 옛날처럼 느껴진다. 순백의 드레스 옆이다.
오전 9시. 밤은 오래 전에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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