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그래!”

 

역시나 한석율은 한석율이었다. 문을 열고 세 사람이 보이는 구석 테이블로 걸음을 떼는 순간, 멀리서 불쑥 몸을 일으키는 인영이 있었다. 채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온 한석율은 망설임 없이 팔을 벌려 내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얼굴 옆으로 희미하게 스치는 향수 냄새와 알싸한 소주 냄새. 맞닿은 단단한 가슴. 허전한 목덜미에 고개를 부비는, 파마기 있는 갈색 머리카락. 한석율이다.

 

“술 냄새 나요, 아저씨.”

“와 이게 얼마만이야 장그래. 이렇게 바쁜 척 할 거야? 응?”

 

얼굴 못 본지 일 년은 넘었나, 그랬을 거다. 자연스럽게 한석율의 어깨를 밀쳐내며 테이블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내 어깨에 팔을 걸치고 옆에서 종알종알 한 소리 해 대는 한석율의 목소리는 분명 오랜만이지만, 오랜만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장그래, 어떻게 그래. 그렇게 문자 다 씹고, 그럴 수 있냐고. 

 

“장그래 씨!”

“장그래 씨, 진짜 오랜만이네요.”

 

환하게 웃는 안영이와 입가에 웃음기를 띤 장백기의 얼굴이 차례로 눈에 들어온다. 꽤나 반가운 얼굴들에 마주 웃어주며 맞은편에 한석율과 자리를 잡았다. 자리에 앉아 외투를 벗어두는 사이 내 앞에는 가득 채워진 맥주잔이 놓여졌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안영이가 내미는 네모 반듯한 하얀 봉투.

 

“아··· 오늘 꼭 오라고 한 이유가,”

“장그래 씨한테 직접 주고 싶어서요.”

 

그리고 얼굴도 보고 싶고. 덧붙이며 눈가에 호선을 그리는 안영이의 표정이 낯설지 않다. 봐봐, 엄청 놀랄 걸? 재촉하는 한석율의 말을 한 귀로 넘기며 빳빳한 종이를 받아들었다. 장그래 씨, 라고 또박또박 이름이 쓰여 있다. 봉투를 열고 확인하는 두 이름은 역시. 생각했던 대로다.

 

“뭐에요, 안 놀라요?”

“예상 했습니다.”

“와 뭐야? 15층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던 거야? 이럴 수 있어? 장백기도 미리 알았다며.”

 

혼자만 몰랐던 것이 억울했는지 한석율은 잔을 채우면서 내내 입을 다물지 않았다. 어쩐지, 그 때 내가 안영이 씨랑 트럭에 있는 거 들켰을 때! 우리 대리님 눈빛이 딱! 예사롭지 않더라고. 근데 그게 다 썸 타는 과정이었다 이거지. 알고 보면 내가 큐피트가 된 거라니까. 어, 안 그래? 툴툴거리면서도 능숙하게 이런 저런 잔을 섞어 만들어낸 한석율표 특제 축하주를 내게 내밀며, 한석율은 내가 가장 익숙하게 봐 온 표정을 지었다. 장난기 가득한, 그렇지만 내게 늘 편안함을 주었던 그 웃음 섞인 얼굴.

 

 

**

 

 

숙취해소제를 사 달라는 한석율의 닦달에 팔을 붙잡혀 끌려 나왔다. 지금 장그래가 사 주는 여명을 마시지 않으면 내일 회사에 못 나간다나 뭐라나. 언젠가 술자리에서 안영이에게만 컨디션을 챙겨준 적이 있었는데 그걸 가지고 아직도 울궈 먹는다. 일단 밖으로 나오긴 했는데 주변에 편의점이 없어서 조금 걸어야 했다. 식당 골목을 따라 한석율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아까 한석율이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마신 탓에 시야가 조금 어지럽다. 이 정도의 취기야 익숙하지만 그 옆에 한석율이 있는 건 꽤나 오랜만이라고 생각했다. 퇴사 후로는 번번이 모임을 피해 왔으니까.

 

"영이 씨, 좋아보이네요."

"그러게."

"···."

“장그래는 결혼 언제쯤 할 생각이야?”

 

한석율이 불쑥 물음을 던졌다. 내 느린 걸음을 천천히 맞춰 걷는 한석율의 옆얼굴을 흘긋 바라보았다. 결혼.

시간이 흐르긴 흘렀음을 느낀다. 이전에는 한석율이 절대 먼저 입 밖으로 꺼내본 적 없는 주제였다. 내게는 늘 웃는 낯이었던 한석율의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그 표정을 보게 된 날을 기억하고 있다. 내 손목을 붙잡고 고개를 숙인 한석율이 잘게 떨고 있던 것. 나는 그 앞에서 그럴듯한 단어들을 나열했었다. 결혼, 어머니, 아이. 내가 바라던 지극히 평범한 삶. 한석율에게 굳이 상처를 주거나 떼어내려는 목적은 아니었다. 그 때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망설임 없이 등을 돌릴 수 있었다. 눈가가 잔뜩 붉어진 한석율을 옥상에 남겨둔 채로.

 

“글쎄요, 아직은 먼 얘기 같습니다.”

“장그래 애기 낳으면 내가 진짜 이뻐해 줄 건데.”

“아직 멀었다니까요.”

 

하지만 내가 결혼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란 걸 깨달은 건 조금 시간이 지나서였다. 일에 매달리다 보니 자연히 우선순위에서 멀어졌고, 어머니는 생각 외로 내게 결혼을 재촉하지 않았다. 결혼은 적당한 시기에 옆에 있는 상대와 하는 거라던데, 그 '옆에 있는 상대'를 찾을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여자를 만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국은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말로 관계가 깊어지기 전에 벗어나곤 했다. 제대로 된 연애 감정을 느낀 게 언제였더라. 아니, 느껴본 적은 있었나. 

 

“장그래 애기는 진짜 귀여울 거야. 눈은 땡그래가지고, 머리는 동글동글하고···.”

 

눈이 휘어지게 웃으며 손으로 허공을 쓰다듬는 한석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개구진 표정이 진심으로 신이 나 보여서 어이없는 웃음이 샜다. 한석율은 이런 식으로 사람을 웃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한 번도 말한 적은 없었지만, 그런 그에게서 여러 번 위로를 받곤 했다. 한석율은 변함없이 유쾌하고 활력이 넘친다.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한 곳에 시선을 빼앗겼다. 가로등 아래 반짝이는. 

 

“한석율 씨는요."

"응?"

 

반지.

 

"결혼, 언제 하십니까.”

“나··· 아마 내년에?”

 

여전히 웃는 얼굴로 내 눈을 마주본다. 어쩐지 현실감이 없다. 가슴이 내려앉는다. 머릿속에 쌓아 둔 무언가가 와장창 무너져내리는 기분이었다. 어째서. 순간 배신감을 느꼈단 걸 인정하고 싶지 않다. 대신 스스로가 조금 우스워졌다. 변하지 않은 한석율의 모습에 안도감을 느낀 것, 여전히 내게만 특별한 한석율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것. 나는 한석율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었나. 입꼬리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느낌에 얼른 고개를 숙였다. 코끝이 시큰하다.

 

“잘 됐네요.”

“뭐, 근데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잘 될 겁니다.”

 

결국 내뱉는 말은 잘 됐네요. 그래요, 잘 됐네요. 과거의 한석율이 아닌 현재의 한석율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다. 당신의 옆자리는 언제부터 채워져 있었던 걸까. 편의점 불빛이 가까워진다. 우리의 대화가 끝나기 전에 뭔가를 더 말해야 할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할지 몰라 걸음을 늦출 뿐이다. 한석율 씨. 한석율···. 혀끝에서 맴도는 단어들은 그대로 다시 삼켜진다.

 

“왜, 할 말 있어?”

“예?”

 

한석율이 걸음을 멈춰 섰다. 불빛을 등지고 선 한석율의 얼굴은 짐짓 걱정스러워 보였다. 아무 말이나 해도 될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하는 얼굴이다. 그래서 나는 한석율에게 기대고, 때로는 장난을 치고, 짜증을 부리기도 하고, 괜한 화풀이를 하기도 했었다. 그는 아마 사회에서 만난 사람 중에서 내게 가장 다양한 감정을 끌어낸 사람일 것이다.

 

"뭔데. 말 해봐."

"괜찮습니다."

"뭐가 괜찮아. 장그래 표정이 안 괜찮은데."

 

이런 건 또 귀신 같지. 한석율은 이게 문제다. 나를 잘 알아서, 어설프게 빠져나가기 어렵게 만든다. 솔직히 말하면 한석율과의 연애를 상상해 본 적이 없는 건 아니다. 설렌 적이 없다고도 못 하겠고. 연애 상대로는 꽤나 괜찮았을 지도 모른다. 아니, 가장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석율은 조금 버거운 존재이기도 했다. 사회의 톱니바퀴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오랜 진통을 겪어 온 내게는 더욱.

 

"그런 거 아닙니다."

"잠깐 와 봐. 진짜 할 말 없어?"

 

한석율이 한 걸음 다가왔다. 가까워졌지만 내게는 더 멀어진 것 같기도 했다. 결국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채워질 수 있는 자리였단 걸 인정해야 한다. 한석율과 나는 각자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거다. 아마도. 가깝지 않게 느껴지는 한석율의 눈을 마주본다. 이제는 여기에 없는 과거의 한석율에게 말해야 하겠지. 세상에 혼자만 있는 느낌이 들지 않게, 적어도 당신에게만큼은 특별한 사람인 것처럼 대해줘서 고마웠다고.

 

“다른 생각 하지 말고 그냥 말해.”

“그만 하고 가죠.”

 

이게 내가 현재의 한석율에게 말할 수 있는 전부다. 입술을 꾹 누르며 한석율을 지나치려는데 덥썩 어깨를 붙잡혔다. 그리고는 버티는 나를 붙들고 문이 닫힌 가게 밑으로 질질 끌고 갔다. 거기에 멈춰 서서 한석율은 이마를 짚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어두워서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한석율은 나를 흘긋 보더니 제 손에서 반지를 빼내서 내 손에 쥐어줬다.

 

“이래도 할 말 없어?”

“뭐 합니까 지금.”

“그냥 받아. 어차피 짝 맞춘 반지도 아니니까.”

“무슨···. 그럼 이거 뭔데요.”

"이거 가끔 검지에도 끼고 다니던 건데. 나한테 관심 없어서 몰랐지."

 

그제서야 반지가 자세히 보였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한석율이 고등학교 때 알바 해서 산 반지라고 자랑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그 때의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서 어쩌고 저쩌고. 뒷말은 흘려 들었기에 잘 기억 나진 않지만 그게 이렇게 커플링 같이 생긴 모양이었는지는 몰랐다. 가만히 반지를 감싸 쥐고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혼자 너무 멀리 갔다왔다. 얼굴에 열이 오른다. 분하기도 하고. 동시에 안도감 때문인지 웃음이 나려고 해서 입술을 꾹꾹 깨물었다. 

 

"여자친구 있는 척은 왜 합니까?"

"장그래가 그렇게 울 것 같은 표정 지을 줄 몰랐거든."

"내가 언제요."

"이제 나한테 솔직해 질 때가 되지 않았나? 장그래. 내가 여자친구 있는 게 그렇게 서운했어? 어?"

 

고개를 숙여 내 얼굴 앞으로 다가온 한석율은 곧 웃음이 터질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장그래 대답 해 봐. 회사 나가고 나서 내 생각 했어, 안 했어. 한석율이랑 연애할 걸 그랬다 후회한 적 있어, 없어."

"아, 아저씨. 잠깐만요."

"아니 나는 오늘 대답을 들어야겠어."

 

실랑이를 하다가 픽 웃음이 나서 고개를 숙였다. 기다렸단 듯이 나를 품에 가두는 한석율을 팔을 뻗어 끌어안았다. 한석율이 흘리는 낮은 웃음소리가 가깝게 들려온다. 맞닿은 가슴이 같은 속도로 뛰고 있다는 것에 나는 다시 한 번 안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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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래 행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