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율은 변했다. 머리를 자르고, 옷은 얌전하게 바뀌었다. 그의 정체성과도 같았던 오대오 앞머리는 이제 없다. 수많은 회사원들 틈으로 사라지면, 그를 쉽게 찾을 수 없도록. 그의 변화는 외모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늘 쉬지 않던 입을 닫았다. 석율은 예전처럼 동기들에게 살갑게 달라붙거나, 눈을 마주치면 활짝 웃는다거나, 시도때도 없이 영업 3팀에 들이닥치던 것을 멈추었다. 그 변화를 가장 먼저 감지한 것은 장그래, 아니 영업 3팀이었다.
한석율 그 친구, 요새는 안 오네. 장그래 씨랑 싸웠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김 대리에게 그래는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석율의 상황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 에너지 넘치던 사람이 이렇게 변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게 기다리라 하지 않았냐,는 무책임한 말로 그를 탓하기엔 그가 치르는 대가가 너무 혹독하다 생각했다. 점차 말라가던 석율의 표정은 어느 순간 생기를 잃었다. 요즘들어 그래는 성가시던 그의 수다가 그립다고 느끼는 제 자신에게 퍽 놀라고 있었다. 저를 보면 강아지처럼 환하게 웃으며 달려오던 해맑은 얼굴과, 귀찮은 듯 쳐내도 웃으며 몸을 붙여오던 능청스러운 그 표정을 보지 못한 지도 한참 되었다. 지쳐보이는 석율에게 마음이 쓰여 16층으로 올라간 적도 있었지만, 복잡한 표정의 그에게 어쭙잖은 위로를 할 수 없어서 먼 거리에서 망설이다 돌아오기만 여러 번 이었다.
그래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그저 석율이 예전의 제게 그랬던 것처럼, 먼저 인사를 건네고 먼저 말을 걸어보는 것 뿐이었다. 한석율 씨, 일찍 왔네요. 그러면 석율은 환하진 않아도 옅은 미소로 그래에게 대답해 주었다. 안녕, 장그래. 씁쓸하게 웃는 그의 얼굴은 처연해서 예전의 유쾌한 웃음을 기억하기 힘들었다. 그래는 그런 그에게 섣불리 힘내요, 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가 꿋꿋이 견뎌내고 있는 시간들이 제 얄팍한 말 한 마디로 메꿔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
장그래가 올린 카자흐스탄 건, 내가 담당자 바꿔서 올리라는 말 못 들었어?
그래는 걸음을 멈춰섰다. 점검 중인 업체 서류를 들고 자리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영업 3팀까지 찾아온 부장 앞에 김 대리와 천 과장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부장의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그래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래는 숨을 참았다. 누군가 목덜미를 확 움켜쥔 듯한 기분이었다. 제 귀에 들어온 한 마디로 오전부터의 상황이 빠르게 파악되었다. 여기저기 동분서주하며 자료를 정리하는 저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눈빛들. 다들, 알고 있었구나.
답답한 사람들이네. 계약직한테 현실적으로 맡길 수가 없어요. 담당자가 왜 담당자인데.
어김없이 나오는 계약직, 이라는 단어에 그래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아프지만 그래에게 떼어질 수 없는 꼬리표였다. 목이 꽉 막힌 것 같다. 얼굴에 열이 오르다 이내 눈가가 뜨거워진다. 그래는 자신을 발견해 어쩔 줄 몰라하는 김 대리와 천 과장의 당황스런 눈빛을 뒤로하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고개를 숙이고 걸어나오는데 코끝이 시큰했다. 그래는 멍하게 방금 전 제가 들었던 말을 곱씹었다. 담당자를 바꾸라는 것, 자신은 계약직이기 때문에. 회사에겐 당연한 이야기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에겐 당연하지 않다.
어딘가에 홀려 있는 사람처럼 손이 저절로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왜 이 상황에서 누군가의 얼굴이 생각이 나는 건지, 왜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듣고 싶은 건지. 그 이유까지 지금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잉 열린 엘리베이터에 타려는 순간, 떠오르는 기억에 그래는 흠칫 놀라며 뒷걸음쳤다.
어쩌죠? 자리가 없네요.
웃으며 엘리베이터 문을 닫는 그들을 애써 덤덤하게 내려보냈던 그 때. 그래가 처음 이 회사로 왔던 인턴 시절, 저를 배척하는 무리 밖으로 겉돌던 아픈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1년 5개월, 결국 바뀐 것은 없다. 그래는 그 자리에서 도망치듯이 비상구 문으로 내달렸다. 무슨 정신으로 계단을 올랐는지 모른다. 숨이 차 가쁜 호흡을 내뱉는 그래의 눈 앞에 16층이라는 숫자가 보였다. 제 걸음이 향한 곳이 어디인지 확인하자 그래는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여기에 와서 뭐 하려고. 그래는 문고리를 잡고 망설이다 이내 손을 떼고 계단에 주저앉았다.
흐릿해진 시야로 손에 놓지 않고 쥐고 있던 서류들을 내려다보았다. 두 달 동안 카자흐스탄에 장가라도 갈 기세로, 그곳의 골목길 하나 하나 다 외울 기세로 제 열정을 바쳤던 일이다. 그리고 그 일에 드디어 승인이 떨어졌을 때, 자신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었다. 이제 다른 보통의 사람들처럼 조심스럽게 한 걸음 씩 내딛는 자신을 그리며, 작은 기대를 품기도 했다. 하지만 회사의 입장은 달랐다. 제가 한 칸 한 칸 올라왔다 생각한 계단은 회사의 것이 아니었다. 힘들게 올라가 다다른 문을 열면 그곳은 막막한 어둠이었을 지도 모른다. 어렵게 쌓아올린 작은 세상이 다시 한 번 무너지는, 악몽. 그래는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괜찮아, 걱정하지 마.
언젠가 제 눈을 마주보며 다정하게 웃어주던 얼굴이 떠올랐다. 굳어있는 어깨를 토닥이며 안심시켜 주던 근사한 미소. 그를 처음 만났던 때에도 그랬다. 미운 오리 새끼처럼 모난 눈초리를 받으며, 잔뜩 움츠러들어 있던 자신에게 다가와 먼저 손을 내밀었던. 그런 그의 앞에서는 이상하게도 자신의 편한 모습과 표정들이 불쑥 튀어나오곤 했다. 서로의 성질을 못 이겨 티격태격하기도, 결국엔 주먹다짐을 하기도 했지만. 가족 외에 그 정도의 다양한 감정을 남에게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는 그만큼 그와 가까운 사이라 생각했다. 회사에서 유일하게 제 본 모습을 꺼내 보여줄 수 있었던 사람.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날 때마다 그는 호들갑을 떨며 저보다 자신을 더 걱정해 주고는 했다.
하지만 지금, 그때의 그는 없다. 아침에 회사 로비에서 마주친 그의 메마른 눈을 떠올리며 그래는 쓰게 웃었다. 이제는 자신이 먼저 그를 바라보아도, 그는 제 눈을 제대로 마주쳐오지 않는다. 더 이상, 궁금해 하지 않는다.
지금 이 문을 열면 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밝은 목소리를 들은 것은 벌써 오래 전 이기에, 모든 것에 무감해지려 애쓰고 있는 그에게 불쑥 찾아가 힘든 내색을 할 용기는 나지 않았다. 스스로를 죽이며 자신보다 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를 그에게, 부담을 안길 수는 없다. 하지만 보고싶어. 그의 웃음을 잃는다는 것이 제게 어떤 의미였는지, 그래는 온 몸으로 절실하게 깨달았다.
한석율 씨. 내가 생각보다 많이, 당신에게 의지했었나 봐.
고개를 숙인 그래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였다.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그래는 한참 동안 그 곳에 앉아있었다. 우연이라도 여기서 문을 열고 나오는 석율과 마주칠 수 있지 않을까. 바보 같은 상상을 해 본다. 그런다면 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예의 그 장난스럽지만 다정한 말투로 괜찮냐고, 우리 장그래 씨 무슨 일 있느냐고 물어봐 줄지도 모른다. 당신은 그런 사람이니까. 여기서 기다리면, 얼마나 기다리면 당신과 만날 수 있을까. 그래는 속으로 천천히 숫자를 세었다. 하나, 둘, 셋, 넷. 그렇게 시간은 조용히 흘렀다. 화가 난 오 차장이 그래를 찾아 계단을 올라올 때까지. 문은 열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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