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들을 처음 본 것은 2009년의 겨울과 봄 그 사이 어느쯤, 이었을 것이다.


대학교에 입학하고 처음으로 가게 된 신입생 오티에 나는 들떠 있기보단 심란한 마음이 컸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내게 늘 설렘보다 부담감을 먼저 주곤 했다. 


학과 건물 앞에 와글와글 모여 있던 무리들은 커다란 전세버스에 몸을 실었다. 나는 옆 자리의 처음 보는 동기와 어색한 몇 마디를 주고받고, 나눠주는 김밥을 먹고 조금 침묵이 흐른 후 눈을 감았다. 버스는 강원도의 한 리조트에 도착해 있었다. 도착한 후에는 짜여진 조별로 모여 수박 겉핥기 식의 대화를 하거나, 한 학번 선배의 신입생 생활에 대한 장황한 설교를 듣는 지루한 시간이 이어졌다.

 

처음 보는 얼굴들 사이에서 잔뜩 긴장한 상태로 끝없이 자기 소개를 해야 하는 것은 꽤나 고역이었다. 이번 오티 이전에 이미 신입생들 끼리 몇 번의 모임이 있었는지, 벌써 제법 친해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가 지원한 기계과는 여학생의 수가 많지 않아서, 나는 그저 발에 채이는 수많은 남자 새끼들 중 하나였다. 우리 조에서 유일한 신입생 여자였던 안영이라는 애는 꽤나 주목을 받고 있었다. 덕분에 외우지도 못할 수 많은 선배들에게 더 많은 인사를 하는 걸 옆에서 지켜봤다. 피곤하겠다 싶었다.

 
레크레이션이 끝나고 밤이 되자 각자의 방에서 제대로 된 술판이 벌어졌다. 처음 접하는 대학교 술자리의 분위기는 낯설게 들떠 있었다. 듣도 보도 못한 게임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몸을 움츠리고 눈치를 보기 바빴지만, 억지로 술을 몇 잔 받아먹으니 나도 경계가 슬슬 풀어졌다.

 

예상대로 선배들은 안영이를 옆 자리의 남자애들과 말도 안 되게 엮어댔다. 특히 나. 처음에 괜한 기사도 정신이랍시고 안영이의 술을 몇 번 대신 마셔줬다가 순식간에 안영이를 좋아하는 남자1로 몰렸다. 바로 옆 자리라 신경써준 것 뿐인데. 그런 분위기에 안영이는 꽤 불편해 보이는 눈치였다. 안영이가 내가 가져간 술잔을 도로 뺏어서 원샷을 한 이후로, 나는 가만히 있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론 무언가에 홀린 것 처럼 계속해서 술잔을 비웠다. 붕 떠있는 분위기에 취해 패기롭게 술술 들이켰더니, 어느 순간 세상이 일렁일렁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 방으로 그들이 들어온 것은 그 때였다.


"하성준. 잘 놀고 있어? 우리도 같이 놀자."
 

어깨동무를 한 두 남자가 신발을 벗으며 들어왔다. 사람들은 그들을 시끄러운 환호성으로 맞이했다.


와,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장그래 한석율 너네 안 올줄 알았더니.
잠깐 시간 나서 석율이 차 타고 왔어. 내일 갈 거야.

 
여기저기 귀에 스치는 대화를 들으며 정신이 몽롱했지만 그 둘의 얼굴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얼굴이 하얗고 오밀조밀 도자기 인형처럼 매끄럽게 생긴 남자. 그는 따뜻해 보이는 회색 니트를 입고 있었다. 사실 처음엔 머리 짧은 여자인가 잠깐 생각했는데, 목소리를 듣고 남자란 걸 알았다.

그리고 그의 옆에 딱 붙어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는, 곱슬한 파마기 있는 오대오 머리의 남자. 어딘가 여유로운 분위기에, 조금 날티나게 잘생긴 얼굴이다. 시원하게 웃는 입매가 매력적이었다. 멍하니 우리 술자리로 끼어드는 그들을 바라봤다.

 

옆에선 한 학번 위인 신다인이 호들갑을 떨며 안영이에게 속닥거리고 있었다. 잘생겼지? 공칠 학번이야. 둘 다 유명해. 안 올줄 알았는데. 안영이는 벙찐 표정으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귀에 들리는 그녀의 말소리를 들으며, 어느새 하성준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는 그들의 얼굴을 천천히 관찰했다.

 

나는 회색 니트를 입은 얼굴 하얀 남자에게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기생오라비 같은 생김새 였는데, 이마는 단정했고 쭉 뻗은 콧날은 꽤나 남자다웠다. 내가 처음 보는 유형의 얼굴이었다. 술을 먹어서 그런지, 그의 동작 하나 하나가 슬로우모션처럼 느리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는 주위를 살피다가 같은 자리에 있던 공사 학번 김동식에게 인사를 건넸다.


"동식이 형, 몇 번째 오티에요 도대체."
"몰라, 인마. 너는 왜 볼 때마다 잘생겨지냐."
 

내 옆에 있던 안영이는 오대오 머리의 남자를 멍하게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성준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야, 술이나 먹어. 결국 올 거였으면서 비싼 척은 왜 했냐.

 
"이름이 영이야?"


하성준의 말을 무시하고 얼굴이 하얀 남자가 안영이에게 말을 걸었다. 네, 안 영이요. 하고 대답하자 남자가 말갛게 웃는다. 나는 장그래.

장그래. 특이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의 얼굴을 계속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아니, 사실은 얼굴에서 입술로 시선이 향해 있었다. 뭐라도 찍어 바른 것처럼 빨갛고 도톰한 입술. 그가 입을 열 때마다 말랑해 보이는 입술의 움직임을 쫓았다. 괜히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와 눈을 마주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저는 장 백기요."

 
묻지도 않았는데 그에게 내 이름을 말했다. 장그래는 천천히 나에게로 시선을 돌리더니 표정 변화 없이 눈을 깜박, 하다가 웃었다.


"백기? 술 많이 마셨지."
 

말투가 다정했다.
 

"누가 이렇게 먹였어? 근데 너,"


되게 잘생겼다. 하고는 호선을 그리며 휘어지는 눈꼬리. 정확히 내 쪽을 향한 시선에 가슴이 일렁거렸다. 그 말을 듣고 있는 나는 아마 꽤나 멍청한 표정이었을 것이다. 장그래의 옆에서 가만히 그의 어깨를 조몰락대고 있던 남자가 그때서야 나를 흘긋 쳐다보았다. 그는 고개를 까딱 하고는 나 대신 안영이에게 말을 걸었다.


"이름 예쁘다. 안 영이? 안녕히 계세요?"
"그런 개그 하지 말라고."
 

장그래는 어깨로 그를 툭 밀치며 핀잔을 줬다. 그는 못 들은척 장난스럽게 입을 쭉 내밀다가 안영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한석율. 오빠라고 불러도 돼요. 눈을 곱게 접는다. 

내가 보기엔 존나 느끼한데 안영이는 조금 설렌 것 같았다. 곧이어 하성준이 눈을 치켜뜨며 그를 타박했다.

 

"개벽이 새끼. 너 영이한테 집적거리지 마."
"집적대는 거 아니야. 어차피 3월에 군대 가잖아. 우리 그래그래 장그래랑."
 

한석율은 장난으로 흑흑, 우는 시늉을 하다가 장그래의 어깨를 끌어당겨 꽈악 안았다. 그 전에 내 쪽을 슬쩍 쳐다본 한석율에게서 날선 기운을 느낀 건 기분 탓일까. 장그래는 몸이 휙 끌려갔다가 눈썹을 구기며 어깨에 올려진 그의 손을 떼어냈다. 아파, 이거 놓고 말해.
 

"맞다, 너네 동반입대 한댔지. 지겹지도 않냐? 2년 동안 그렇게 붙어 다녔으면서."
"몰라. 한석율 이 새끼가 자꾸 나 따라다녀."
"좋으면서 또 이런다."
 

한석율이 이번에는 장그래의 턱에 손을 갖다대고 우쭈쭈, 어르는 소리를 냈다. 그 손도 매정하게 쳐낸 장그래는 정말 귀찮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거렸다. 야. 너 때문에 여자가 안 생겨.

 
"너넨 하여튼 신기해. 여자 친구도 안 사귀고 맨날 둘이서만 노는 게 재밌냐."
"그럼 네가 소개 시켜 주든가."
"소개시켜 줄 여자 있었으면 내가 벌써 만났지."


그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킬킬 웃었다. 그러다 자신들에게 쏠려있는 시선을 느꼈는지, 툴툴거리는 하성준의 고개를 잡고 억지로 우리 쪽으로 돌렸다. 나는 곁눈질로 그들을 보다가 잠시 웃음기가 가신 한석율의 싸늘한 눈과 마주쳐 괜히 뜨끔 했다. 왜 자꾸 쳐다 봐. 내가 뭐 잘못 했나. 

 

"아, 우리가 흐름 끊어서 미안. 술이나 먹자."


또 술이라니. 생각하니 머리가 어질어질 하다. 관자놀이에 손을 짚고 고개를 숙였다. 방 바닥에 있는 소주병들이 내 쪽으로 쑥 기울어지는 것만 같다. 눈꺼풀이 의지와 상관 없이 자꾸만 내려감긴다. 불을 껐다 켰다 하는 것 처럼 시야가 깜박, 깜박거린다.

무겁게 쏟아지는 머리 위로 장그래의 말소리가 들렸다. 백기야, 너 괜찮아? 저 괜찮아요, 눈을 뜨고 대답을 하려 했는데 입 안에서 우물 거리던 소리가 삼켜졌다. 흐릿한 시야로 걱정스런 얼굴의 장그래가 다가온다. 백기 재워야겠는데. 멀어지는 그 말을 끝으로 눈 앞은 불을 끈 듯 어두워졌다.

 

 

 

 

 

 *

 

 

 

 

 

문득 눈을 떴다. 새카만 방, 나는 한쪽 벽을 바라본 채 누워있었다. 갈증에 목이 타고 속은 울렁거리고, 머리는 깨질 것 같았다. 아아. 한마디로 딱 죽겠다.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등 뒤에서 소곤거리는 목소리에 몸이 얼어붙었다.
 

미친 놈아..
그러니까 왜 자꾸 자극해, 어? 너 일부러 그랬지.
내가 언제. 잠깐, 밖에..
문 잠갔어.

 
숨을 죽이고 이게 무슨 상황인 걸까 잠시 고민했다. 내가.. 어디에 있는 거지. 마지막 기억은 장그래가 걱정이 담긴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눈이 감겼고, 아마 거실에서 잠이 든 나를 누군가가 이 방에 데려다 놓은 것 같다. 그리 오래 잠들진 않았던 것인지, 시끌벅적한 문 밖에서는 술자리가 계속 이어지는 듯 했다.

그런데 왜 내 등 뒤에 그들이. 이 목소리는 분명히.
 

하지마아..응? 옆에 백기,
자고 있어. 괜찮아.
그래도, 잠깐만, 아, 읏.
소리 내지 말고. 
뒤진다 너. 진짜..


옷가지가 밀려 올라가는 소리, 혀가 질척하게 엉키는 소리, 살과 살이 맞부딪치는 소리. 적나라한 그것들이 여과 없이 귀로 들어오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나는 숨을 참았다. 눈을 감고 반대 편으로 돌아서 있지만 온 신경이 잔뜩 곤두 서 있었다. 머릿속으론 영상이 그려졌다. 아, 미치겠네.

심장이 너무 세게 뛰어서 그들에게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여기서 이러고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걸까. 그렇다고 지금 일어난 척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쩌지. 애먼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다.
 

아파, 아, 흐윽.
 

울음기 섞인 억눌린 신음이 낮게 터져나왔다. 쉬잇, 우리 그래 착하지. 낮게 깔린 한석율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내 입술로 입을 막았는지 신음 소리가 안으로 먹혀들어갔다. 읍, 으, 흐읍. 울먹이는 장그래의 얼굴이 상상되어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한동안 애처롭게 이어지던 울음 소리는 어느 순간 묘하게 바뀐다고 느꼈다. 그 때부턴 서로 입을 막지도 않았다. 대신 그들은 서로에게 상상할 수도 없게 야한 단어들을 내뱉었다.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이거.. 꿈 아닐까.

 

 

 

 

 

*

 

 

 

 

 

창문을 넘어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떴다. 여전히 속은 좋지 않고 머리는 한 대 맞은 듯이 어지러웠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방 문 쪽을 바라보았다. 밤새 전사한 여러 동기와 선배들이 순서대로 줄 지어 누워있었다. 그리고, 내 바로 옆에 나란히 누워 잠들어 있는 그들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장그래는 베개가 아닌 한석율의 팔을 베고 잠들어 있었다. 그들의 평온하게 잠든 얼굴을 보자 지난 밤 귀를 울렸던 소리가 생각나 얼굴이 화끈거렸다.

꿈 아니었을까. 꿈이었을 지도 몰라. 그래, 그럴 리가 없잖아.

넋이 나간 상태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장그래가 어깨를 움찔거리더니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일으켰다. 목이 타는지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주위를 멍하게 두리번거린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
"..."
 

우리는 말 없이 몇 초간 서로를 바라봤다. 그의 눈에서 잠시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그게, 꿈이 아니었다는 걸.


"..."
"..."
"잘 잤어?"
"네."
"나랑 석율이랑 이제 못 볼거야. 어제 들었지? 군대 가는 거. 나중에 제대하면 아는 척 해줘."


그는 순진한 아이 같은 표정으로 맑게 웃었다. 나는 그 안에 무언의 부탁이 들어있다고 느꼈다. 햇살을 받은 그의 얼굴이 해사했다.

 

 


 

 

*

 

 

 


 

그들을 다시 보게 된 것은 정말로 한참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들이 제대했을 무렵 나는 독일로 교환학생을 떠났기 때문에, 그들과 학교에서 다시 마주치게 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교환학생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온 나는 어느 가을의 늦은 저녁, 중앙 도서관에서 기숙사로 걸어오는 길에 그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여전히 둘이 함께였다. 내가 처음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한석율이 장그래의 어깨를 감싸고 우리 방으로 들어왔던 그 때처럼.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먼저 인사를 하지 않았다. 내가 왜 그들을 피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햇살을 받으며 웃고 있던 장그래의 얼굴이 떠올라서 일수도 있고, 누군가의 비밀을 원치 않게 공유하게 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서 일 수도 있다. 사실은 그 밤의 일이 꿈 속에서 몇 번이나 되풀이되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그들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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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야 미아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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